지난 6월 16일, 2018 박래군과 함께 하는 전쟁기념관 다시보기 -전쟁기념관에서 평화를 말하다-가 진행되었습니다. 올해로 3년차를 맞는 행사에 30여명이 넘는 많은 분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이하에서는 현장감을 느낄 수 있도록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박래군 대표가 해설하는 형식으로 정리해보았습니다. 꼭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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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 전쟁기념관 앞에서 해설을 하는 박래군 대표>

 

안녕하세요. 군대를 보는 시민의 눈,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대표를 맡고 있는 박래군입니다. 보시는 전쟁기념관은 1만평 규모로 총 9,000여점의 전쟁과 관련된 기록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그 중 70% 이상은 한국전쟁과 관련된 것이고요. 문제는 어떤 내용이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명칭에서 보듯 이 장소는 전쟁을 ‘기념’한다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는 한국전쟁을 승리적 관점으로 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정으로 보면 전쟁기념관 설립은 1987년 민주화 대투쟁 직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어렵사리 재집권에 성공한 군부세력은 사회의 민주화로 국민의 안보의식이 약화된다고 인식했습니다. 사회의 민주화를 안보의 불안요소로 본 것이지요. 그래서 노태우 군사정권은 국민의 반공의식과 안보의식을 고취시킬 목적으로 전쟁기념관을 건립합니다.

 

민주화시기 반공안보관 정립을 위해 설립된 전쟁기념관

 

그 이전에 한국전쟁을 기념하는 사업은 박정희정권때 대대적으로 이뤄지기도 했습니다. 전국에 전적비가 세워졌죠. 그 맥을 잇는 대표적 사업이 전쟁기념관 건립사업입니다. 현재 남북간 대화가 열리고 북미정상회담이 열리는 상황임에도 전쟁기념관은 북한을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북진통일을 주장했던 이승만의 관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지요. 저희 단체가 이런 문제를 바꿔내려는 노력을 시작하고 있고 꼭 바꿔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필요는 이 곳에 1년에 약 200만명의 관람객이 찾아오는데 그 중 대부분이 학생이라는 점도 있습니다. 여전히 북을 적으로 느끼게 하고 전쟁을 친밀하게 느끼게 하는 다양한 전시기법들은 애초 군사정권의 건립 목적을 충족시키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있었던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과 여성과 아이들의 희생들은 삭제되어 있지요.

 

오늘 이 공간을 돌아보며 전쟁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지 함께 고민해보는 시간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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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실 Ⅰ>

 

아시다시피 1945년 해방이 되고나서 미국과 소련이 일본군을 해체한다는 명목으로 한반도에 진주했지요. 당시 북한은 김일성이 정권을 장악해나가고 있었고 남한은 여운형을 중심으로 하는 건국준비위원회가 자생적으로 전국에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이를 불법화햇습니다. 결국 이승만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이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과정으로 나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사회주의를 표방한 북한과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정부는 냉전적 이념 대립에 기초한 갈등이 심화됩니다. 한국전쟁 전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간에 치열한 군사적 대립이 이어집니다. 이승만은 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북침을 주장합니다. 전쟁이 나면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을 것이라며 호언장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실제 전쟁이 발발하자 말과 달리 아무런 준비가 없던 이승만정부는 순식간에 패퇴합니다.

 

전쟁기념관은 전시의 초입에서 북한의 남침과 관련한 자료들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북한의 김일성정권과 소련을 적으로 규정합니다. 한국전쟁이 북한과 소련이라는 적과 싸운 정의의 전쟁이라는 논리 전개를 위한 필수적 사전 장치입니다. 그러나 1950년에 발생한 한국전쟁은 어느 누가 먼저 공격했느냐만으로 규정될 수 없는 복잡한 양상의 전쟁입니다. 당시의 국내적 요소와 미소를 중심으로 형성되던 냉전이라는 국제적 요소를 함께 검토해야 합니다. 또 한국전쟁의 과정을 통해 이승만정부를 중심으로 한 반공세력이 강화되는 것도 살펴보아야 할 주요한 지점이지요.

 

전쟁의 시작을 단순화하는 전쟁기념관의 의도

 

전쟁기념관은 한국전쟁이 일어날 당시의 맥락들을 삭제하고 누가 먼저 총을 쏘았냐는 부분을 중심으로 거론함으로써 전쟁의 총체성에 대한 인식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 목적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의 형성만이라면 일정 성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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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실 앞에서 한국전쟁의 발발 상황을 설명하는 모습>

좀 구체적으로 들어가 볼까요? 이 곳에서는 당시 남북 군사력 비교를 표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는데요, 병력 수에서 남한군 10만 대 북한군 19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남북한 병력수를 다룬 다른 자료들에 의하면 남한군은 18만명 정도로 병력 수에서 큰 차이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또 하나 북한군이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되며 사상적으로 무장된 군대로 형성되어 가는 과정임에 반대 이승만의 국군은 일제때 일본 육사를 나오거나 한 인물들이 군대의 지휘부를 형성하며 이념적 차이를 가진 병사들 사이에 갈등과 이견이 존재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전쟁 하면 백선엽이라는 인물이 영웅처럼 거론되는데요, 그가 일제시대 간도특설대 출신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간도특설대는 일제가 한국사람으로만 만든 독립군 파괴부대였지요. 이승만 정부 초대 국방장관을 했던 정일권 그리고 박정희가 다 여기 출신이죠. 이들의 면면을 보면, 초기 한국군의 수뇌부가 어떤 인물들로 채워져 갔는지 가늠할 수가 있어요.

 

특히 북한군이 소련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는 것에 반해 이승만정부는 지속적인 북침주장을 함으로써 당시 한반도에서 전쟁을 원치 않았던 미국이 군사적 지원으로 꺼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점에서 북한군이 사전에 치밀하게 전쟁을 준비했기 때문에 전쟁 초기 일거에 패퇴할 수 밖에 없었다는 주장은 일면 맞지만 당시 남한의 군대가 제대로 준비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논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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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 군사력 비교표를 설명하는 모습>

다음은 한국전쟁 직전 남한 상황과 관련해 중요한 부분인데요, 언급드린대로 당시 남한은 좌우익의 대립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죠. 청산대상이던 친일파가 주요 정치세력으로 재 득세하고 민중들은 이를 지지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사회 전반적으로는 사회주의에 대한 지지가 더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당시 사회의 주요 개혁과제였던 친일파 청산과 토지분배와 관련해 사회주의자들이 내놓은 대책이 민중의 요구에 부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군정은 친일파를 중심으로 한 이승만세력을 지지하고 나머지 정치세력을 배제시켰습니다. 백범 김구나 여운형이 암살되는 상황은 이런 배경을 안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주 43 항쟁이 발생하지요.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실제 그 이전인 1947년 3월 1일 삼일절 행사때 경찰이 집회참가자들에게 무작위 발포하며 시작된 것이지요. 분노한 제주의 민중은 단독정부 반대 투쟁으로 나아가게 됐고 이승만 정부는 당시 여수에 주둔하던 14연대에 이를 진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14연대의 병사들은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며 거부했고 이들의 저항은 여수순천지역의 민중에 동의를 얻으며 확산되어 갑니다. 놀란 이승만정부와 군부는 대규모 진압작전을 전개하고 저항한 군인은 물론 여수순천지역의 민중들을 살해합니다. 이 학살은 제주 43의 학살로 이어지죠. 여순사건은 아직 진상규명이 안되었습니다만 제주 43은 공식 보고서도 나왔고 국가차원의 사과도 있었죠. 그러나 전쟁기념관은 아직도 그 부분을 반영하지 않고 있습니다. 특히 여순항쟁의 경우 국방부는 여전히 반란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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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과 여순항쟁 사건을 설명하는 모습>

여전히 왜곡되고 있는 사건들 제주 43, 여순항쟁, 노량진 전투

 

전쟁기념관의 사실 왜곡이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이 바로 이 노량진 전투와 관련된 것인데요, 이 디오라마 형식의 전시는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마치 한강다리를 파괴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당시 북한군은 서울 외곽지역에 진입 중이었고 인도교 위에는 피난 중인 서울 시민들이 있었다는 점이었지요. 이 다리 폭파로 다리 위에 있던 800여명의 시민이 숨졌죠. 같은 시각, 북한군을 물리치고 있다고 국민에ㅔ게 거짓말 방송을 하게 한 이승만은 이미 전날 대전으로 도망간 상황이었구요. 그럼에도 전쟁기념관은 이 전투를 북한군을 저지시킨 것으로 미화하고 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이때 인도교 폭파로 피난가지 못하고 서울에 남은 시민들이 석달여 후 서울이 다시 국군에 수복됐을 때 북한군 부역자로 몰려 상당수가 학살 당했는데 전쟁기념관은 이 역시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천상륙작전 관련해서는 맥아더가 영웅으로 묘사되고 있는데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은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기 전 미 해병대가 사전 정찰을 통해 인천지역에 인민군 없었음을 확인했음에도 대규모 함포사격을 실시해 10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점이에요. 언급드린대로 서울을 수복하고 나서는 인민군에 부역했다는 이유로 또 많은 사람들이 학살되었죠. 이 상륙작전때 국군 해병대에는 제주지역 사람들이 많았다고 하는데요, 제주 43으로 빨갱이로 몰리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 밀항 경찰이나 군대에 들어간 제주지역 청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송악산 백조일손지묘 바로 옆 사계리에는 제주 43 이후 제주 떠나 살길 찾아 떠났다 죽은 사람들을 기리는 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부분은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 학살을 다루고 있는 전시관인데 북한군에 의한 학살부분 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언급한 것과 같은 국군과 미군 그리고 이승만 정부의 경찰 등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실들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지요.

 

배제된 역사들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들

 

이 표를 보시면 미 극동군 사령부 산하 부대에 불과한 한국군의 위상을 보게 됩니다. 전쟁이 발발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우리 군대의 지휘권을 넘겨버렸지요. 문제는 이 상태가 지금까지도 진행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1992년 10월 노태우정부 당시 평시작전통제권을 환수하기로 합의하고 1994년 12월 환수합니다. 하지만 정작 군사지휘권의 핵심인 전시작전통제권은 아직도 미군 손에 있죠. 노무현정부때 환수하기로 했지만 이명박, 박근혜정부를 거치며 사실상 환수가 무산되었지요. 이 상태로는 진정한 독립국가로 볼 수가 없어요. 그 상태가 바로 이 한국전쟁때 확정된거죠. 문재인 정부가 빠른 시일 내에 전작권을 환수한다 하는데 환수도 환수지만 더 이상 미국에 종속되지 않는 제대로 된 환수가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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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전쟁지도체계를 설명하는 모습>

<한국전쟁실 Ⅱ>

 

이승만은 한국전쟁 내내 북진통일을 주장했습니다. 제 나라 군대에 대한 지휘권도 없는 주제에서 말이죠. 우리나라 국군의 날이 왜 10월 1일인줄 아세요? 1950년 10월 1일 서울을 수복한 군대가 삼팔선을 넘은 날이 10월 1일이어서 국군의 날로 정했다는거죠. 보통 다른 나라의 군대가 창설일을 기념하는 것과 비교하면 독특하죠. 군대가 북한을 아직 미수복 지역으로 판단하고 있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1951년 정전협상이 시작되었는데 핵심 쟁점은 군사분계선을 확정하는 문제였다고 합니다. 이 과정에서 한 치의 땅을 더 확보하기 위한 고지전이 벌어집니다. 백마고지를 비롯한 전선의 수많은 고지에서 뺏고 뺏기기를 반복하죠. 이 과정에서 무수한 군인들이 죽어갑니다. 자료를 보면 정전협상 과정에서 공산군측은 전선에서의 전투행위를 멈추자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거부하죠. 이유는 애초의 38선 이북에서 전쟁을 멈춰야 공산군의 침략이 실패했다고 말할 명분이 필요했다는 것이에요. 이 때문에 북쪽으로 조금이라도 더 치고 올라가기 위한 전투가 계속됩니다. 그 과정에서 숱한 죽음들이 발생하고요. 고지전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 과정에서 죽어가는 남북한 병사들의 절규가 잘 담겨 있습니다. 한 번 보시기를 권합니다.

 

고지전 멈출 수 있었던 죽음들

 

전선에서 교착상태가 길어지는 중 이승만정부는 지리산 등에 있는 좌익세력을 소탕한다며 후방토벌작전을 전개합니다. 이를 위해 만들어진 부대가 백야전 사령부라는 것인데요, 그 사령관이 백선엽이었죠. 이 부대는 견벽청야작전이라는 것을 전개하는데 공비들이 마을에 발 붙이지 못하게 한다는 목적으로 마을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하는 무시무시한 작전을 전개합니다. 당시 작전지침을 보면 한 명의 공비를 죽이기 위해 마을을 없애야 하면 그리 해도 된다는 내용이 확인됩니다. 이 후방지역작전의 과정에서 거창, 산청, 함양 등지에서 많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됩니다. 이와 관련한 기록도 전쟁기념관은 철저히 배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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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방지역작전에 대해 부연 설명하는 신재욱 활동가>

<해외파병실>

 

이같은 작전은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되었을 때 다시 재현됩니다. 백마부대, 맹호부대 등 베트남에 간 한국군 부대들은 베트공의 공격으로부터 병력을 지킨다는 목적으로 숲과 마을을 없애고 기지를 구축합니다. 이에 거부하는 베트남 민간인들은 가차없이 살해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용맹했다 하는데 이는 다시 말해 잔인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한국군은 베트남 여성들을 강간하거나 데리고 살기도 했는데 이렇게 해서 생겨난 아이들은 ‘라이 따이한’이라 불렸습니다. 우리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의 태도를 비판하지만 우리가 피해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행한 잘못에 대해 가해자로서 사과해야 하지만 우린 아직 그렇지 못합니다.

 

베트남전 민간인 학살 가해자로서의 자리에서 다시보기

 

전쟁기념관의 말미에 있는 이 파병관은 기본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도움 받았던 우리가 이제 다른 나라를 도와주고 있다는 논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전도 그렇고 이어 살펴볼 이라크전도 그렇고 주로는 미국의 요구에 의한 해외 파병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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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전 파병은 우리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왔던 사안이었습니다. 2003년 3월 미국은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독재정권으로부터 이라크 민중을 해방시킨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켰지만 대량살상무기는 발견되지 않았고 전쟁 과정에서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라크는 전쟁으로 인한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함께 주요 참전국이었던 영국은 이 전쟁과 관련한 진상조사 보고서인 칠콧보고서에서 아무런 명분 없은 거짓된 전쟁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여기 전쟁기념관은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통해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얼마 전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유감 표명을 했음에도 살펴보신대로 국방부가 운영하는 이 곳 전쟁기념관은 그런 변화들을 수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역사와 사실에 대한 배제와 왜곡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죠.

 

전쟁기념관 바꿔내기 위한 노력 시작되어야

 

오늘 2시간 정도 전쟁기념관을 함께 돌아보며 한국전쟁의 의미와 관련한 전쟁기념관의 그릇된 전시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문제는 이같은 내용이 앞서 말씀드린대로 우리의 아이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전달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는 이를 바꿔내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려 합니다. 관심 가져주시고, 이 전쟁기념관 다시보기는 일회성이 아니라 상시적으로 진행됩니다. 저와 저희 단체 활동가들이 시간을 내어 소규모의 인원이라도 일정을 맞춰 답사와 해설을 진행해드립니다. 주변에도 알려주셔서 오늘 느낀 문제의식이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민들에게 확산될 수 있도록 함께 해주셨으면 합니다.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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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하신 분들과 함께>